다시쓰는이력서


원하는 학교의 원하는 학과는 아니었지만, 중, 고교 도합 6년과 재수하면서 날려먹은 시간과 돈 대비 적당히 적당한 곳에 진학해서 당당하게 4년 더 놀 수 있는 기회를 가졌었다. 지금 생각해보면 그땐 참 멍청했지ㅠ 중간에 군대도 다녀오고 휴학도 해보면서 훌쩍 이십대 중반을 넘겨버리고, 슬슬 하나 둘 주변 놈들이 '돈' 을 벌며 미래를 기약할 즈음에 아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 학교에 돌아가 나이 앞자리가 '3' 이 되었을 때 졸업하고 또 1년을 보냈다. 아니 보낼 수 밖에 없었다. 성적은 KBO 에이스 수준이고, 어학성적은 없었으며, 자격증이라고는 운전면허가 유일했으니. 여기저기 아르바이트도 하고 일용직 노가다도 다니면서 꾸역꾸역 학자금 대출을 조금씩 갚아나가긴 했는데 늘 비참했다...

하늘이 도왔는지, 서른 하나가 되던 해에 그럴싸한 회사에 들어갔다. 운이 좋았다. 사실 나라도 나를 채용안할건데, 그들은 날 뽑아줬다. 관둔지 거의 5년인데 지금도 날 채용해준 점은 정말 고맙다고 생각한다. 대략 이년 반 동안 다녔다. 중간에 잠시 샛길로 새어 투잡이랍시고 술 파는 가게를 하나 냈다. 주말마다 찔끔찔끔 들러서 젊은 사장놀이 한 게 전부였는데 여기서 들어오는 돈이 월급의 2배를 넘은 적도 있고...아직 젊다, 어쩌면, 나라면, 더 큰 무언갈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회사 관두고 가게에 올인...한 결과, 수입은 점차 회사 다니나 별반 다를게 없었고, 대규모 조직체의 일원으로서 누렸던 모든걸 잃었다.

어쨌거나, 그 가게 정리하고 거의 2배 더 큰 규모의 가게를 오픈했다. 입지 선정부터 매장 컨셉까지 오픈에 있어 거의 모든 과정에 참여했다. 이때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의견을 조율하고 비용절감이나 더 나은 결과 등을 위해 내 의견을 관철시킬 때 짜릿하기도 했고, 일이 재밌기도 했다. 결과부터 말하자면 폭망...이제는 서른 초반도 아니고 중반도 아니고 마흔 다다른 나이인데 그 동안 쌓아온 잔고 앞에 '-(마이너스)' 가 붙었다. 동업한지라 전부 내 돈은 아니었지만, 수 억에 달하는 보증금을 월세로 퉁치고 나왔다.

거울 속에 비친 내가 나 자신이 아닌 느낌으로 3주 가량 살았다. 중간중간 취업사이트 들낙거리며 이력서도 제출해봤는데, 당연히 서류광탈...그나마 좋은 점은 아들이랑 온종일 붙어서 놀 수 있었다는 거. 한 시간에 한 번 꼴로 죄책감과 절망감이 밀려와 뜬금없이 눈물을 쏟기도 했지만, 빚쟁이 백수가 되고 나니, 아들과 어울릴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는 장점도 있었다.

마냥 슬퍼할 순 없는 노릇이라 새것과 다름없는 수년전 다이어리를 펼치고 여기저기 메모해가면서 약간의 준비를 더 해 입사지원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.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었는지, 아니면 또 다시 하늘이 도운건지 모르겠는데, 한번 더 결과부터 말하자면,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한다. 다행히도, 보수가 나쁘지 않다, 아니 좋은 편이다. 예전에 다니던 회사 꾸준히 다녔으면 받았을 돈과 별반 차이가 없는 수준. 김칫국드링킹 먼저 해보자면, 마흔 전에 내 앞에 놓인 '빚' 을 최대한 치워버리고 싶다.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 나아가 차도 바꾸고 싶다. 부단히 열심히 살아서 그게 내가 내게 주는 선물이었음 좋겠다...만, 그만큼 벌어들일 수 있을랑가 모르겠다. 아마도 내가 11살 때 부터 우리집은 가난하구나...라고 절실히 느낀 것 같은데, 우리아들이 지금 3살...남은 8년 동안, 비록 늘 꿈꾸던 '부자아빠' 가 되진 못하더라도 평타는 치는 아버지가 되고 싶다.






ㅡ,.ㅜ

by 사람해요 | 2018/03/23 07:33 | 이야기속으로 | 트랙백 | 덧글(4)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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Commented at 2018/03/27 13:58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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Commented at 2018/03/28 20:46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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Commented by 리히터N at 2018/03/31 07:53
저도 요리가 배우고싶다고 회사부터 때려치우고 지금 일을 하고있어서 그런가.. 와닿는 글이었습니다.
새출발 응원합니다. 잘 되실겁니다.
Commented by 사람해요 at 2018/04/11 05:42
감사합니다! 지시받아 움직이고 그마저도 100% 를 다 못했던 예전의 제가 원망스럽기도 하네요 ㅠ 매번 출근길 모자란 잠에 힘겨워하던 그때의 자신도 안타깝구요ㅠ 지금은 더 나이들어 더 약해지고 힘이 드는데요 벌써 이시간에 눈이 떠지네요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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